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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점순 2019-08-14 23:50:00
신안 다이아몬드제도 버스투어를 마치고
 신안 다이아몬드제도 버스투어를 마치고 1 신안 다이아몬드제도 버스투어를 마치고 2
신안 다이아몬드제도 버스투어
이번 여름휴가는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매년 휴가철이면 온 가족이 가까운 곳에 형제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모처럼 혼자만의 단출한 여행을 떠나고자 한 달여 전에 남도한바퀴 ‘신안 다이아몬드제도여행’ 버스투어를 예매 했다.
올해 4월에 개통한 천사대교를 건너 마음의 천국에 다녀올 요량이다. 오전 9시 20분 유 스퀘어 32번 홈에서 대기한 버스에 오르니 오늘의 일정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송정역에 들러 신안 천사대교를 건너 자은도와 김환기생가, 안좌도 퍼플교, 다시 천사대교를 거쳐 귀가하는 일정이다.
오늘 해설은 임동수님이 수고해 주셨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시작된 해설은 내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다리로는 인천대교가 그 첫 번째이며, 광안대교와 서해안대교에 이어 네 번째가 바로 신안의 ‘천사대교’라고 한다. 총연장 7.22km의 3주탑 현수교와 연장 1천4m의 주탑 사장교 형식으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갈매기가 비상하는 형상이란다. 야간조명이 멋진 곳이니 꼭 야경을 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1,025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가 76개, 무인도가 949개이며, 인구는 약 4만 4천여 명이라고 한다.
암태도에 들어서며 소금 생산 과정을 얘기해 주었다. 모두 열 두 단계를 거쳐야 우리가 먹는 소금이 생산된다고 한다. 바닷물을 모아 가두는 것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음식에 넣을 소금이 만들어지기까지 열 두 단계의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소금을 사용할 때마다 염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천사대교 구간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애기동백 벽화! 우와 동백나무가 파마머리 같다. 담 안에 동백나무가 있고 바깥쪽 벽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환한 얼굴이 나를 반긴다. 너무나 이색적인 벽화로 잠시 머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다. 벽화에 얽힌 이야기를 짧게 전한다.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로 결정하고 처음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벽화를 그리는데, 이 벽화작업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신안군수에게 전화해 ‘내 얼굴도 그려달라’고 했단다. 군수는 어렵게 제주도에서 애기동백 한그루를 구해 나란히 심었고, 마을 벽화를 맡은 김지안 작가가 수줍음 많은 할머니 얼굴과 장난기 가득한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다음으로 팔금도를 지나는 투어버스, 여덟 개의 섬을 막아 한 개의 큰 섬으로 만들었다는 팔금도, 여덟 개의 예쁜 새가 앉아있는 듯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신안은 인재의 고장이라며 신안 출신 인물을 소개한다. 반기문님, 김대중님, 이세돌님, 김환기님, 각각의 인물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아 머릿속에 그려본다. 신안이라는 이 섬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차창으로 스치는 작은 물레방아 모양에 눈을 주는데 그곳은 염전이 아니고 새우양식장이라고 한다. 5월에 1cm의 새우를 기르기 시작하여 추석 무렵이 되면 25cm로 자란 흰다리새우(왕새우)가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된다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안좌도의 ‘김환기고택’에 나를 내려놓았다. 우리나라에서 열네 번째 신안에서는 세 번째로 큰 섬인 안좌도, 그곳에 한국의 피카소인 김환기화백을 만나러 왔다. 2013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라고 하니 올해로 106년이 되는 셈이다. 미술계에서 우리나라 모더니즘 1세대로 손꼽히는 김환기 화백은 근대 서양화가이다.
머리에서 불이 날 것만 같은 땡볕 아래 해설사 임동수님은 마당 한가운데서 김화백에 대한 얘기를 풀어낸다.
집 전체를 둘러본다. 고택의 목재는 1920년대 백두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기와집이며 사각의 돌 위에 세워진 나무기둥을 세운 ㄱ자 건축물이다. 사찰은 보통 배흘림기둥인데 반해 이 고택은 사각기둥의 민흘림이다. 기둥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굵기가 좀 다른데 윗부분이 가늘면 집이 더 높아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위로 솟은 굴뚝은 보이지 않은데 이 집도 굴뚝을 아주 낮게 만든 모양이다. 비가 오는 날 밥을 할 때면 기압이 낮아 연기가 마당에 깔린다. 갈라진 틈새에 연기 스며들어 해충의 침입을 방지하는 등 소독 효과가 있다고 한다.
김환기화백의 어머니는 태몽을 꾸었는데 ‘빨랫줄에 널린 형형색색의 천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춤을 추면서 푸른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김화백은 어려서 서당공부, 즉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마루 위 커다란 액자에 그의 연보가 있다. 김화백은 어린 시절 서울로 유학을 갔고, 스무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고 하니 유복한 집안이었나 보다. 6‧25가 나기 전 3년여 동안 서울대 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해군 종군 화가, 홍익대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고 쓰여 있다.

해설사의 설명을 빌면, 앞쪽으로 보이는 산은 안산이라고 한다. 완만한 곡선이다. 이런 자연환경이 김화백 화폭을 메우는 부드러운 선들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화백 생가는 부근에 다른 집이고 현재 이 고택에서 살게 된 것은 7세 때인 1930년부터라고 한다. 1913년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 중동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업을 다 마치지 않고 이곳에서 생활하다 1933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그 시기를 그림으로 승화시키지 않았나 짐작한다.
김화백에게 그의 아내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김환기 화백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김화백의 아내 김향안 여사는 누구인가? 시인이자 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진 수필, 건축, 그림에까지 다재다능했던 바로 이상의 아내(본명 변동림)이다. 그녀가 이화여전 영문학과에 다닐 때 오빠의 소개로 이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은 그녀에게 “우리 멀리 떠날까, 우리 같이 죽을까”라는 말을 건넸고 그 말에 반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잘 다니던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고 친구집에 간다며 보따리를 싸 이상시인에게 갔다는 그녀, 1936년 결혼을 했으나 짐짓 결혼생활은 4개월 만에 끝이 났다고 한다. 당시 이상은 폐결핵을 앓았고 치료차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남편의 병수발을 했으나, 그는 안타깝게도 26년 7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얼마나 허망했을까?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친구로부터 김환기화백을 소개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화백은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무명 화가였고, 조혼하여 딸 셋을 두었으며, 이혼까지 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불리한 조건은 다 갖춘 김화백, 김화백은 차마 먼저 말을 못 꺼냈고 둘은 적극적 만남보다는 서신으로 사랑을 키워갔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을까,
당시 김향안 여사의 본명은 변동림이었다. 풍류가였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너는 동방의 옥구슬이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는데 그 변동림이 어떻게 김향안이 되었을까?
‘향안’은 김환기화백의 호이다. 늘 고향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의 호는 ‘고향의 언덕’이라는 뜻의 호 ‘향안’을 썼다. 재혼을 결심하고 김화백에게 변동림이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의 호 ‘향안’을 나에게 준다면 김향안으로 바꾸겠다," 는 고백을 했고, 김화백은 기꺼이 승낙하여 1944년 결혼을 했다. 결혼 후 김화백의 게으름까지도 사랑했다고 하는데 한 번도 잔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어느 날, 김화백이 “내 그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니 그녀는 남편에게 기꺼이 국외로 나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방법을 묻자 본인이 먼저 나가서 알아보겠다고 하고 1955년 프랑스 파리로 먼저 갔으며, 현지에서 김화백이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하고 전시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1년 뒤 아내의 뒤를 따라 파리로 가서 3년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장르에 심취했다고 하는데 김환기화백 하면 우선 ‘달항아리’가 떠오른다. ‘항아리’라는 작품은 왠지 친근하고 둥글둥글한 모양이 낯설지 않다. 화려한 그림도 있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매화와 항아리’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또한 그는 파란색을 잘 썼다고 하여 ‘블루 환기’로 유명하다. 그의 초창기 작품으로는 ‘론도(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어우러져 있는 그림)’, ‘항아리와 매화’, ‘피난열차-(부산전투에 참여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작품 중 ‘사슴’은 그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봄의 소리’라는 작품은 음악가들이 점들의 높낮이를 보고 한번쯤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한번 들어보고 싶다.
김화백의 미국 진출은 그에게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점, 선, 면을 이용해 그리기 시작한다. 통일된 색조 단색 톤의 점으로 채워진 전면점화(全面點畵)의 대표적인 작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얽힌 이야기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김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그의 절친한 벗인 김광섭이 서울에서 뉴욕으로 시 한 수를 보낸다. ‘저녁에’라는 詩였다. 그 시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다. 시의 구절에서 그림의 제목을 붙였다.
점 하나하나가 모여 마치를 우주를 연상 시키는 듯하다. 김화백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고향에 두고 온 친구들 눈동자 하나하나를 점으로 표시했다. 고향의 그리운 바다의 파도를 그렸다. 시에서 느껴지는 애절한 그리움을 김화백은 그렇게 그림으로 표현했나 보다.
김환기화백은 1974년 갑자기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으나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61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마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4년 후 김향안여사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환기재단’을 만들고 흩어져 있는 김환기화백의 그림을 사 모아 1992년 서울 북악산 자락인 종로구 부암동에 사설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을 세웠다고 한다.

김향안여사의 사랑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여인, 김화백을 위해 앞길을 열어주고 그를 세계무대에 우뚝 서게 만든 여인, 남편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아내인 김향안 여사의 내조에 큰 박수를 보낸다. 자기 자신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김향안여사는 화단에 등단도 하고 미술평론가로서 자신의 삶도 충실히 살아냈다. 2004년 뉴욕에서 작고하였고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김환기화백의 진가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림 한 점에 100억 원이 훌쩍 넘어간다니, 우리나라 그림의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화백을 넘어선 김환기화백이 무척 크게 느껴진다.
미처 가보지 못했던 ‘환기미술관’에 들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작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혹시 아는가, 김광섭의 목소리가 아닌 김화백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라는 노래가 아득하게 들려올지.
자은도 분계마을의 천년 ‘여인송 숲’을 걸으며 뜨겁던 태양도 스러져갈 준비를 하는 시간 너른 바다와 잠시 마주했다. 기이한 소나무 숲을 뒤로하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여 퍼플교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안좌도 본섬에서 박지도로, 박지도에서 반월도로 이어지는 다리는 그 이름도 특이한 ‘퍼플교’이다. 지붕과 건물, 하다못해 손수레까지도 보라색 옷을 입은 퍼플교를 건너며 ‘중노둣길’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다보니 어느새 다시 되돌아오는 길이다. 스님과 비구승, 두 스님이 각기 마주보는 섬에 살았는데 스님이 먼저 하나하나 돌을 들어다 다리를 놓아오자, 반대쪽 비구승도 돌을 하나하나 옮겨와 다리를 놓아왔다. 바다 가운데서 두 스님이 만났지만 그만 바닷물이 차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노둣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걸으니 뜨거운 태양도 견딜만 했고 다시 되돌아 나오는 발걸음도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천사대교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 안내를 받아 기념사진을 남기고 오늘 하루의 여정을 잘 마무리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해설을 해주신 임동수해설사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특히 ‘김환기고택’ 해설하실 때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해설해 주셨는데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림 설명까지 한작품한작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무척 감사했어요.
하루 동안 안전을 책임져주신 기사님과 우연히 제 옆에 앉게되어 짝꿍이 되어주신 어르신, 앞뒤로 간식거리를 나누어주신 여러 어르신들께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항상 건강하시고 이 여름을 잘 나십시오, 라는 말씀 전합니다.

버스 투어 2019. 8. 6.
내용 정리 2019. 8. 10.
남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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